도요토미의 영광과 도쿠가와의 승리를 품은, 일본 권력의 상징 '오사카성'
- 최고관리자
- 2025-08-28
본문
구마모토성, 히메지성(또는 나고야성이나 히코네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으로 꼽히는 오사카성은
역사 속에서 수차례의 전쟁과 재건을 거쳐 온 일본 통일과 권력 교체의 상징이자 웅장한 규모의 성벽과 해자, 천수각을 자랑하는 오사카의 대표적인 관광지입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에 이시야마 혼간지가 있었던 오사카 중심부에 지은 성으로
이곳은 혼간지파와 오다 노부나가의 이시야마 전투에서 혼간지파가 10년간 대항하였을 정도로 지리적으로 탁월한 요새의 위치였는데
북으로는 요도가와 강, 동쪽으로는 히라노 강, 서쪽으로는 해안가와 강이 있는데에다 평지가 많은 남쪽 조차도 깊은 이중 해자로 인해
성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당대 최고의 요새이자 성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은 당시 일본 최대 규모의 성으로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특히 천수각에는 금박 장식과 황금 잉어(샤치호코)를 활용하여 꾸며놓았는데
이 때문에 황금의 성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하였습니다.
오사카성이 이처럼 사치스러움과 웅장함을 극대화하며 문화와 권세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전국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새로운 시대의 지배자로서 위엄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담겨있었습니다.
이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정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갔지만
오사카성은 여전히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거점으로 삼으며 도요토미 세력의 본거지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1615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사이에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였는데
그 전투 중 폭격과 화재로 인해 건물들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협정에 따라 이중 해자 중 바깥 해자는 완전히 매립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과 해자는 그 이후 재건된 것 입니다.
(불길을 두려워하던 히데요시가 호랑이가 불을 막아준다는 일본 전통에 따라 호랑이 문양을 곳곳에 장식해두었는데 결국 오사카성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게 되었습니다..ㅠㅠ)
이 때 전투에서 패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인 야마자키 요도노가 성이 함락당하자 오사카성의 뒷 편에서 자결하였고 성에는 그 자결터가 남아있습니다.
오사카성에는 성의 주인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과 그를 모셔놓은 신사가 있는데
일본의 107대 천황인 고요제이 천황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이라는 신호를 내려주면서 호코쿠 신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출세운을 받아보고자 하는 많은 일본인들이 이 곳에 와서 참배한다고 합니다.
오사카 전투 이후,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네타다는 도요토미 가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기존 성벽과 해자를 허물고
그 위에 더 크고 견고한 석벽을 쌓았습니다. 또한 천수각 역시 이전보다 훨씬 높고 위압적인 규모로 세워, 성을 보다 방어적이고 군사적인 요새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이는 도요토미 가문의 영향력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동시에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의도였으며, 이 후 오사카성은 서일본 통치를 위한 막부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의 영광과 도쿠가와의 권위를 품었던 오사카성은
수많은 전쟁과 재건을 거치며 단순한 성곽을 넘어 일본 권력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역사의 상징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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